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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騎馬군단보다 더 센 군대가 있었다!

곰발바닥개발바닥 2014. 2. 11. 21:03
몽골騎馬군단보다 더 센 군대가 있었다!
奴隸戰士(노예전사) 집단 맘루크가 몽골 기마군단을 무찔러 중동의 이슬람 세계를 지켜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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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of a Mamluk, 1779.

세계사에는 바이킹 海賊(해적), 몽골 騎馬(기마)군단, 사무라이, 요한 기사단, 예니세리(오스만 터키의 외인步兵), 프랑스의 외인부대와 같은 용맹한 戰士(전사)집단들이 등장, 커다란 足跡(족적)을 남겼다. 이들 가운데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가장 오래 영향을 끼친 戰士 집단은 맘루크이다.


맘루크는 黑海(흑해) 및 카스피해 북쪽 草原(초원) 지대에서 활약하였던 튀르크(돌궐) 계통 기마민족 출신 노예집단을 가리킨다. '소유물'이란 뜻이다. 9세기부터 이슬람 세력(바그다드를 수도로 한 압바시드 왕조)은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면서 충성심이 강한 튀르크 系(계) 청년들을 노예로 사들여 독립부대를 편성, 왕을 保衛(보위)하도록 했다. 노예들은 토착세력과 연고가 없어 오로지 왕에게만 충성을 바치는 장점이 있었다. 튀르크 族(족)은 몽골 族과 비슷한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몽골 騎馬(기마)군단의 主力(주력)은 항상 튀르크 족이었다. 튀르크 족은 훈 족이나 흉노 족과 같은 뿌리이다. 신라 金氏(김씨) 집단을 몽골지역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온 흉노 족 출신이라고 보는 視覺(시각)이 有力(유력)하다.

맘루크 戰士(전사)들은 이슬람으로 改宗(개종)하여 아랍 말을 썼다. 그들은 집단생활을 통하여 단련되고 충성심이 강하였으며 종교적 열정 또한 대단하였다. 이슬람 세계의 주민들은 주로 아랍 족인데 그들은 맘루크 집단을 존경하였다. 일부러 노예가 되어 맘루크 부대에 편성되려고 한 이들도 많았다. 이슬람 지배층은 맘루크들 사온 뒤엔 노예로 대우하지 않았다. 후견인 역할을 하고 교육을 시켰으며 고위직에 등용하고 軍의 지휘를 맡겼다. 서서히 맘루크 戰士 집단은 이슬람 여러 나라에서 중견층을 형성하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王權(왕권)을 차지하였다.

맘루크가 맨 처음 집권하여 王朝(왕조)를 세운 곳은 이집트이다. 1249년 6월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지휘하는 제7차 십자군이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 도시 다미에타에 상륙하였다. 이집트의 아유비드 왕조 술탄은 이 와중에 죽고 권력은 아들을 거쳐 부인에게 넘어갔다. 바이바르가 지휘하는 맘루크 부대는 반격을 개시, 루이 9세를 포로로 잡았다가 돈을 받고 풀어주었다. 정권의 불안정이 계속되다가 맘루크 부대장 쿠투즈가 왕이 되어 바흐리 王朝를 창건하였다. 1259년의 일이다. 奴隸戰士 (노예전사)집단이 왕조를 세운 것이다.

이듬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는 決戰(결전)에서 승리한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후레구는 1258년에 바그다드를 점령, 이슬람 세계를 대표하는 압바시드 왕조의 왕을 죽이고, 시리아를 거쳐 이집트를 향하여 몰려오고 있었다. 몽골군 사령관 키트부가는 기독교인이 된 튀르크族이었다. 이슬람 文明(문명)세계는 이집트만 남은 상태였다. 1260년 9월 지금의 이스라엘 아인 잘루트(예루살렘 북쪽)에서 몽골 기마군단과 이집트 맘루크 기마군단이 정면대결하였다. 후레구는 몽골의 칸이 죽어 歸國(귀국)하였고, 그의 부하 키트부가가 지휘를 맡았다. 양쪽은 각기 1만~2만으로 추정되는 기마군단을 동원하였다. 兩軍(양군)의 主力은 다 같이 튀르크族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생리를 잘 아는 사이였다. 말과 활, 그리고 기습과 기만과 역습을 주로 하는 戰法(전법)도 비슷하였다. 맘루크 부대를 지휘한 것은 쿠투즈 왕과 바이바르 장군이었다. 하루 만에 끝난 이 결전에서 맘루크 기마군단이 압승, 몽골군의 지휘자 키트부가를 잡아 처형하였다.

戰史(전사)학자들은 맘루크 騎馬軍團(기마군단)이 승리한 이유를 조직적인 훈련과 이슬람 교리로 무장한 정신력에서 찾으려 한다. 그 뒤 시리아를 중심으로 맘루크와 몽골군의 싸움이 계속되는데, 일진일퇴를 거듭하지만 몽골군은 아프리카로 들어오지 못한다. 맘루크는 몽골군의 말발굽으로부터 이슬람 文明(문명)을 지켜낸 것이다. 뿐만 아니다. 맘루크 군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남은 십자군 세력도 몰아냈다. 기독교와 몽골군으로부터 이슬람을 지켜냈다는 게 맘루크의 브랜드가 되었다.

아인 잘루트에서 개선한 바이바르 장군은 쿠투즈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들은 산업을 발전시키고 카이로에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맘루크들은 재산을 상속할 권한이 없었다. 돈을 모으면 當代(당대)에 다 써야 했다. 주로 건축물을 짓는 데 썼다. 지금 카이로에 남아 있는 이슬람 건축물들은 맘루크 시대 것이 많다.

유목기마민족 출신, 즉 맘루크, 튀르크, 몽골족은 권력세습을 부정하였다. 권력은 특정인의 소유가 아니라 가장 힘센 사람이 차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맘루크 시대에 王(술탄)은 제 命(명)대로 사는 경우가 드물었다. 늘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王이 죽으면 다음 王은 實力(실력)에 의하여 결정되었다. 권력투쟁이 극심하였으나 사회는 活力(활력)이 있었다. 맘루크 왕조 시절 카이로와 이집트는 이슬람 세계의 문화적 중심이었다. 영토도 지금의 시리아, 팔레스타인, 北아프리카로 확장되어 오스만 터키가 패권을 잡기 전엔 가장 큰 이슬람 帝國(제국)이었다.

맘루크 시절 이집트는 카이로를 흐르는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팠다. 카이로는 나일강 下流(하류)를 통하여 지중해와도 연결된다. 즉, 지중해와 인도양 사이 무역을 중계하는 立地(입지)를 갖게 된 것이다. 맘루크는 베니스와 함께 東西 무역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이슬람 세계를 종교적으로 통치하는 교황을 칼리프라고 한다. 8세기 초, 이슬람 主力(주력)은,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움마야드 칼리프 체제를 무너뜨리고, 바그다드에 압바시드 칼리프 체제를 세웠다. 1258년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점령, 칼리프를 죽였다. 그 3년 뒤 이집트 맘루크 왕조는 압바시드 칼리프 체제를 카이로에서 재건, 이슬람의 정통을 잇는다.

맘루크 왕조는, 1517년 오스만 터키 군대에 패전, 이집트는 屬國(속국)이 된다. 맘루크 軍과 오스만 터키 軍은 튀르크족을 主力으로 한 점에서 비슷하였지만 다른 점도 있었다. 맘루크 군대는 그때까지도 기마전술에만 의존하였으나 터키는 기마부대뿐 아니라 소총부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오스만 터키가 이슬람 세계의 宗主國(종주국)이 되면서 문화의 중심도 카이로에서 이스탄불로 옮겨갔다. 오스만 터키의 술탄은 이슬람 교황(칼리프)도 겸하도록 하였다. 오스만 터키가 명실공히 이슬람 세계의 정치와 종교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오스만 터키는 이집트를 통치하는 데 여전히 계급화된 맘루크 세력을 활용하였다. 맘루크 세력은 이집트의 지배층으로서 19세기까지 존속하였다. 1798년 나폴레옹이 프랑스 국민군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였을 때 그들을 맞아 싸운 것도 맘루크 기병이었다. 포병과 소총으로 무장한 프랑스 군대는 카이로 근방에서 벌어진 이른바 피라미드 전투에서 간단하게 맘루크 騎兵(기병)을 제압하였다.

나폴레옹은 맘루크 기병의 충성심을 높게 평가하였다. 맘루크 戰士를 호위병으로 채용하고 맘루크 출신의 기병부대를 만들었다. 이 부대는 1805년의 아우스텔리츠 전투와 1815년의 워털루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지금의 체코 브루노 근교에 있는 아우스텔리츠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오스트리아, 프랑스, 러시아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참전하였다. 프랑스의 大勝(대승)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王家(왕가)가 이끌던 神聖(신성)로마제국이 800년만에 해산된다.

맘루크 세력의 역사적 역할이 끝난 것은 1811년 3월1일이다. 나폴레옹이 영국군의 공격을 받고 이집트에서 물러난 후 다시 이집트의 통치권을 회복한 오스만 터키는 알바니아 출신인 모하메드 알리를 이집트 총독으로 보냈다. 그는 이집트의 봉건영주 계급 역할을 하는 맘루크 세력을 제거하지 않으면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알리는 이날 700명이 넘는 맘루크 지도자들을 시타델이라고 불리는 궁전으로 초대하였다. 연회를 베풀겠다고 속인 것이다. 맘루크 지도자들이 말을 타고 正門(정문)으로 이어지는 골목을 지날 때 미리 매복시켜놓았던 알리의 군대가 집중사격을 가하였다. 한 명만 살아서 달아나고 전원 학살되었다. 그날 밤 알리는 부하들을 지방으로 보내 맘루크 영주들을 다 죽였다.

1206년엔 이슬람이 지배하던 인도에서도 맘루크 戰士(전사)들이 왕조를 만들고 1290년까지 집권하였다. 이 기간 맘루크는 인도를 몽골군단으로부터 지켜냈다. 이라크는 1747년부터 1831년까지 맘루크의 지배를 받았다. 그들은 오스만 터키의 지시를 받는 입장이었지만 사실상 독립적으로 이라크를 통치하였다. 이들은 주로 그루지아 출신이었다. 1831년 오스만 터키 정부는 맘루크의 마지막 지도자 다우드 파샤를 타도하고 직할 통치를 하게 되었다. 맘루크의 군사문화는 세계 여러 나라의 군사제도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미국 해병대 장교들이 행사 때 착용하는 禮刀(예도)는 맘루크 칼이다.

* 참고로 無敵(무적)의 징기스칸 군대를 패배시킨 나라는 세 곳이다. 맘루크의 이집트, 사무라이의 일본, 그리고 월남이다.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소치 부근에 시리카시안 족이 살았는데, 이들은 노예전사로 이집트로 팔려가 맘루크의 일부를 형성했다. 이들이 1382년부터 1517년까지 이집트 맘루크의 王權을 장악,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등 이스람 식 문화 융성에 기여하였다.

[ 2014-02-10, 16:48 ] 조회수 : 2461트위터트위터 페이스북페이스북 미투데이미투데이 요즘요즘 네이버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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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2137 2014-02-11 오전 11:19
특정 지역 사람들이 흉노족이라 폄화하던대 알고보니 폄화멸시 당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으쓱한 마음이 생기내
성산 2014-02-11 오전 8:22
잘 읽었습니다.
서양사 중심으로 교육을 받아서, 알랙산더의 르네상스만 알지, 징기스칸의 세계 대 제국건설은 잘 모르는 불행한(?) 한국인들 입니다. 한국인들의 유전자와 현존하는 많은 문화가 몽골계통 인데도 말입니다.
자장가 2014-02-10 오후 11:02
역사의 수레바퀴는 끝없이 돌아 가고 있습니다. 한가지 못내 궁금한 것은 그 당시 몽골이 세계를 지배했지만, 과연 그로인하여 몽골과 그 국민들이 얻은 것이 무엇인가 ? 하는 점입니다. 몽골은 세상을 향하여 뻗어 나갔지만 그냥 역사의 저 건너 편으로 사라져 간 것인가요 ? 세상 곳곳에 무수한 불꽃을 남기고 퍼져 나갔지만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것일뿐이었나요 ? 징기스칸의 무덤마져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불꽃처럼 꽃잎처럼 그렇게 사라져 갔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