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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斗煥의 KAL기 폭파 대응과 李明博의 천안함 침몰...

곰발바닥개발바닥 2010. 4. 3. 22:11
全斗煥의 KAL기 폭파 대응과 李明博의 천안함 침몰 대응
만약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李明博 정부가 지금 天安艦 침몰사건을 처리하는 식으로 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구미제 사건이 되든지, 안기부 自作劇이란 누명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
全斗煥 정부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직후에 가졌던 心證이나 情況보다 더 확실한 증거와 情況을 갖고도 李明博 정부는 침몰 사건이 난 지 8일째인데도 여전히 '북한정권 개입 증거는 없다'라는 태도이다.
 
趙甲濟   
 1987년 11월29일 바그다드를 출발, 아부다비를 경유, 김포공항으로 오던 KAL 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近海 상공에서 통신이 두절, 실종, 공중폭파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全斗煥 정부는 안기부의 초기 판단에 따라 이 사건을 북한정권에 의한 테러라고 일찍암치 단정, 정부기능을 총동원, 대응에 나서는 한편, 미국 등 우방국과의 협조를 강화하였다.
 
  KAL858이 미얀마 상공에서 실종된 이후 안기부의 全 조직에는 비상이 걸렸다. 안기부는 처음부터 북한정권에 의한 공중폭파로 보고 정보망을 가동시켰다. 북한은 서울올림픽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를 그 무렵에 여러 번 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에서 사건이 터진 것이었다. 수사의 定石대로 아부다비에서 내린 대한항공기 탑승자들을 체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두 일본인의 이름이 떠올랐다. 바레인 入國카드에는 신이찌, 마유미라고 적혀 있었다. 안기부에서는 이 表記방법에 주의하게 되었다. 일본인이라면 하찌야 신이찌와 하찌야 마유미라고 성명을 다 쓰든지, 하찌야란 姓만 쓰는 게 정상인 데 이름만 쓴 것은 도무지 일본인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안기부는 바레인과 아부다비의 공관 및 대한항공 지점과 협조하여 두 사람의 여권기재 사항을 파악하여 일본경찰에 조회하였다. 하찌야 신이찌란 사람은 일본에 살아 있음이 확인되었다. 마유미의 여권번호를 알아보니 그 번호의 사람은 남자였다. 즉 두 여권이 모두 위조로 밝혀진 것이다.
 
 12월1일 아침 일본 여권을 가진 두 男女가 바레인에서 비행기를 타기 직전에 검문을 받는 도중 남자는 飮毒자살하고 여자는 飮毒실신하였다. 국가안전기획부의 KAL858 실종사건 수사담당 과장 ㅎ씨는 두 사람이 음독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무릎을 쳤다고 한다.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飮毒현장에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신이찌와 마유미가 사용했다는 독약 앰플은 ㅎ과장 팀에게는 익숙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2월2일 ㅎ과장은 한 동료와 함께 바레인 행 비행기에 올랐다. 신광수(辛光洙) 간첩사건의 자료에는 안기부가 압수한 辛의 소지품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독약 앰플도 있었다.
 
 두 사람이 홍콩을 경유 바레인에 도착한 것은 현지시간으로 새벽이었다. 아침에 바레인 대사관에서 대사가 주재하는 對策회의가 열렸다. ㅎ과장은 『신이찌와 마유미가 북괴공작원이란 증거를 갖고 왔다. 이번 폭파가 저들의 소행임을 입증하면 우리가 피해당사국으로서 신병을 인수하게 된다. 이런 방향으로 일하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대사관측에서는 바레인 당국이 이 사건 처리에 있어서 미묘한 국제관계에 관해 신경을 잔뜩 쓰고 있다고 했다. 한국 측과의 접촉은 『대사하고만 만나겠다』는 입장이라는 것이었다. 3일 아침에 ㅎ과장은 정(鄭)대사의 승용차 뒷자리에 타고 바레인 범죄 수사국 사무실로 갔다. 鄭대사는 수사실무책임자인 영국인 핸더슨씨를 만나러 들어갔다. ㅎ과장은 『핸더슨씨에게 「한국에서 전문가가 한 분 왔는데. 이 사건의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만나보지 않겠느냐」고만 말씀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ㅎ과장은 주차장에서 20분쯤 기다렸다. 들어오라는 연락이 왔다. 핸더슨씨는 6∼7명의 참모들을 배석시킨 채 ㅎ과장을 맞았다. 바레인의 각 부처 장관은 王族이 맡고 있지만 그 밑의 실무책임자는 영국인들이었다. 60대의 고참 수사관 출신인 핸더슨씨도 그렇게 고용된 영국인이었다. ㅎ과장은 가져간 자료를 일일이 제시하면서 마유미와 신이찌가 북한공작원임을 설명해 나갔다. 북한의 對南 테러전략과 역사, 붙들린 간첩들이 자살했거나 자살을 기도한 사례와 그때 사용된 도구를 이야기해 주었다.
 
  ㅎ과장은 30여년간 對간첩수사 부문에서 일해온 사람이다. 그는 『북한의 테러에 관한 한 안기부의 對共수사전문가들이 세계 최고의 노우하우를 갖고 있다』면서 대단한 자부심을 보이기도 했었다. ㅎ과장은 신이찌와 마유미의 여권이 국가기관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핸더슨씨에게 주장했다. 『이 정도의 정교한 위조는 私조직의 수준에서는 불가능하다. 최신 인쇄시 설을 갖추어야 하는 등 그 뒤에 굉장한 조직과 전문인력이 있는 그런 위조 여권이다. 더구나 여기에 기재된 내용은 북괴 간첩 미야모도 아키라가 실존 인물인 하찌야 신이찌에게 만들어준 여권의 그것과 일치한다』
 
 ㅎ과장은 『두 사람의 비행기표도 이상하다. 베오그라드에서 로마로 바로 가면 될텐데 왜 복잡한 경로를 거쳐 들어가려 하고 있는가. 일본으로 돌아가려면 아시아 남쪽을 도는 항로를 잡아야 하는데 왜 거꾸로 돌고 있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핸더슨씨 측에서는 ㅎ과장의 설명을 듣기만 하였다.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고 한다. 핸더슨씨는 ㅎ과장의 설명이 대충 끝나자 『신이찌가 담배개비의 독약 앰플을 깨물고 죽었다고 보느냐』고 했다. ㅎ과장은 『청산 알약은 먹기가 힘들다』면서 북한 공작원들이 사용한 자살도구의 변천사를 쭈욱 설명한 뒤 신이찌가 깨문 담배개비속 앰플의 성분과 형태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했다. 핸더슨씨는 『그렇게 자신이 있느냐?』고 물었다.
 
  ㅎ과장은 『130퍼센트쯤 확신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를 따라 오라』면서 핸더슨씨는 회의실 같아 보이는 방으로 ㅎ과장을 데리고 갔다. 탁자 위에는 신이찌와 마유미의 소지품들이 놓여 있었다. ㅎ과장은 마유미가 깨문 담배개비속 앰플을 집어들고 『바로 이것이다』고 했다. 핸더슨씨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좋다. 신병처리문제를 검토하여 상부에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핸더슨씨가 두 사람의 신병을 한국에 넘겨주는 방향으로 건의할 것이라는 감을 잡을 수 있었다. 핸더슨씨는 헤어질 때 ㅎ과장에게 『당신이 필요한 시간에 언제든지 연락하고 오면 만나주겠다』고 했다.
 
  ㅎ과장이 바레인 당국의 협조를 받아 병상에 있는 마유미, 즉 김현희(金賢姬)를 만난 것은 12월6일이었다. ㅎ과장은 金의 그런 위장술보다는 손 모습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관상이 한 인간의 역정과 운명을 알려주는 것처럼 손, 특히 여자의 손은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을 엿보게 한다. 金의 손은 결코 평탄한 삶의 궤적을 그려온 여자의 손이 아니었다. 고운 손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칠고 못생긴 손도 아니었다. 단련된 손, 그러나 여자의 부드러움이 그 굳어진 角質 밑에 숨어 있는 듯한 손이었다고 한다.
 
 1987년 12월15일 서울로 실려오는 대한항공 특별기 안에서 金賢姬는 계속 눈물을 흘렸다. 金이 자백을 시작한 뒤 수사관이 그때 흘린 눈물의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남조선 특무들에게 혹독한 신문을 당하고 개돼지 취급을 받은 뒤 죽을 생각을 하니 끔찍해서 울었습니다. 남조선 특무는 북한간첩을 잡으면 귀와 코를 자르고 눈을 빼는 등 몹쓸 고문을 가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공작원으로 뽑혀 젊은 나이에 이렇게 인생을 끝내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났습니다. 공작원으로 선발돼 집을 떠나는 날. 어머님께의 표정도 떠올랐습니다』
 
 만약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李明博 정부가 지금 天安艦 침몰사건을 처리하는 식으로 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구미제 사건이 되든지, 안기부 自作劇이란 누명을 썼을 가능성이 있다.
 
 전두환 정부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을 북한 소행으로 단정하였을 때 이 心證을 뒷받침할 物證은 없었다. 만약 당시 全斗煥 정부가 李明博 정부 식으로 "범인이 한국인이란 증거는 없다. 따라서 이 폭파가 북한의 소행이란 증거는 없다. 섣부른 豫斷은 남북관계를 악화시킨다. 특히 서울올림픽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신중하게 나왔더라면 김현희를 한국으로 데리고 오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다면 김현희는 바레인에서 재판을 받든지 일본여권 위조범으로서 일본에 끌려가 재판을 받았을 것이다.
 
 두 나라 수사기관이 안기부처럼 완벽한 수사를 할 수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김현희를 범인으로 단죄할 순 있었겠지만 김정일의 지시를 立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全斗煥 정부가 李明博 정부처럼 소극적으로 나왔더라면 미국 CIA의 협조를 받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美 CIA는 안기부와 협조하여 김현희의 동구 공산권내의 행적을 자세히 조사하여 한국측에 제공하였던 것이다.
 
 全斗煥 정부하의 安企部가 김현희의 자백을 받아 그를 한국인으로 단정, 사건 전모를 발표를 한 것은 범행 한 달 보름 뒤인 1988년 1월15일이었다. 李明博 정부라면 이 한달 보름간은 '북한의 테러라는 증거는 없다'고 하여 자신 없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김정일에게 면죄부를 주었을 것이다. '북한의 테러라는 증거는 없다'고 한 달 보름 동안 미적거리던 정부가 갑자기 "김현희는 한국인으로 밝혀졌으므로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은 북한소행이다"고 발표하였더라면 누가 믿었겠나?
 
 全斗煥 정부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직후에 가졌던 心證이나 情況보다 더 확실한 증거와 情況을 갖고도 李明博 정부는 침몰 사건이 난 지 8일째인데도 여전히 '북한정권 개입 증거는 없다'라는 태도이다.
 
 만약 1987년에 전두환 정부가 이명박 정부 식으로 대처하여 KAL기 폭파의 원인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하였더라면 김정일은 두번째, 세번째 항공테러를 일으켰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천안함 침몰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것은 김정일의 추후 도발을 부추기는 효과가 있다. 李 대통령은 자신이 유치한 오는 11월의 G20 회의를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을 축소하려 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북한의 보다 큰 도발을 불러 G20 회의가 정말 취소될지 모른다. 全斗煥 정부가 대한항공기 폭파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하였기에 북한은 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추가 도발을 포기하였던 것이다.
 
 
 
 
 
 
 
 
 
 
[ 2010-04-03, 15:50 ] 조회수 : 1230


P 니가그래서님의 파란블로그에서 발행된 글입니다.